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문단 편집) == 생애 == [[시베리아]]의 서쪽에 있는 도시인 [[토볼스크]]에서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파일:external/ncc.phinf.naver.net/0306_img01.jpg|width=100%]] 부친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는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마리야 드미트리예브나 멘델레예바'는 [[유리]]공장 주인의 딸이었는데, 특히 어머니는 당시 여성들에겐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전근대적인 사회상에 저항해 오빠들의 공부를 훔쳐보는 것으로 배웠을 정도로 학식은 물론 사상적으로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드미트리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두 눈을 [[실명]]하여, 그 시점에선 친정의 유리공장을 물려받아 육아는 물론 경영까지 떠맡았음에도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충실히 해낸 억척스러움도 갖고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멘델레예프는 공부는 그럭저럭 열심히 했으나 고교 시절까지 공부에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다. 드미트리가 15세가 됐을 적에 부친이 투병 끝에 돌아가시고, 유리공장도 불이 나 전소되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친은 이 모든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 드미트리와 그 손위의 누나만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상경했다. 그리고 고등 교육기관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키고자 했으나, 당시는 타 지역 출신에 대한 입학 제한 규정 등이 존재했던 터라 시베리아 촌동네 출신의 드미트리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학과 의학교에도 지원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이 당시 [[카데바]] [[해부실습]] 장면을 보고 졸도해 떨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결국 대안으로 드미트리는 교원 양성소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교원 양성소에 들어간 지 10주 만에, 드미트리의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으나, 사랑하는 아들의 성공은 보지 못한 것이다. 모친이 작고하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매진하여, 우수학생에게 수여되는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때 본격적으로 화학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1855년에 건강이 안 좋아 러시아 남부의 [[오데사]]로 자청해 발령을 받고 교원생활을 시작하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학 공부를 하기 위해 준비하여 이듬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고 다시 1년 후인 1857년에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 입학했다. 2년 후인 185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국비 유학하여, 카를스루에 학회(1860년 9월)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테니슬라오 칸니차로를 비롯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화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분자량과 원자량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그들의 주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1년에 귀국했으나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 과학 교재 관련 저술 및 편집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186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공업연구소 화학 [[교수]]로 처음 발령, 3년 뒤엔 일반화학 교수가 되었다. 이 당시 자기 눈에 차는 교재가 없어서 자기 손으로 500쪽짜리 '화학원론'이란 교과서를 집필했는데, 이게 세계적으로 히트해서 경제적인 여유를 얻게 되었고, 또한 그 책을 저술하면서 당대 화학자들의 화두였던 원소들의 분류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의 화학자 [[존 돌턴]]이 '[[원자론]]'을 발표하면서 원자량의 개념을 내놓은 이래로 많은 화학자들은 원소들 간의 유사성 및 논리적인 순서를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1862년 프랑스의 광물학자 알렉상드르 드 상쿠르투아는 원소를 나선형으로 배열하면 비슷한 성질의 원소가 수직으로 나열된다는 주장을 했고, 또한 1864년에는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가 음표를 써서 원소를 배열하면 8개를 주기로 비슷한 원소들이 나타난다는 '[[옥타브의 법칙]]'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시도들은 불완전했다. 멘델레예프와 뉴랜즈는 서로 교류하며 원소의 규칙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1869년 3월 6일, 그는 자신이 알아낸 것을 '''《원소의 구성 체계에 대한 제안》'''이란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는 수직으로는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그리고 수평으로는 유사한 성질을 가진 원소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불과 35세였다. 당시 다른 과학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몇몇 원소들의 배열이 당시에 알려져 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원소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칸도 있어서 명백한 오류처럼 보였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기존의 원자량 측정이 잘못된 것이며, 또한 비어있는 칸의 원소들도 곧 나타나게 될 것이라면서 자신감을 보였다. 지금 시대가 아닌 당시 사람들이야, 당연히 이런 반응에 이뭥미 내지는 [[이뭐병]]했다. 이후 1875년 프랑스의 화학자 부아보드랑이 [[갈륨]]을 발견했다. 드미트리는 갈륨의 발견은 자신이 에카알루미늄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한 덕분이라고 주장했고 부아보드랑은 갈륨을 발견한 실제 연구는 자신이 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드미트리는 부아보드랑이 발표한 갈륨의 데이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근거도 없이 일부 측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는데, 갈륨의 밀도와 질량이 멘델레예프가 예측한 값과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재실험 결과 그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자 부아보드랑은 자신이 발표한 데이터를 철회하고, 드미트리의 예측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리고 5년 후 1882년 [[독일]]의 화학자 클라멘스 빙클러가 [[저마늄]]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드미트리가 예언한 것과 거의 딱 들어맞는 성질과 원자량을 갖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이론이 점차 인정받으면서 화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멘델레예프 덕분에 나는 화학이 정말로 과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라는 말도 나왔다. 듬성듬성하던 [[주기율표]]도 시간이 지나면서 빠진 부분이 채워지고 개선되어졌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에서 대우는 매우 미묘했는데, 1880년 제국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임명되지 못했다. 1890년에는 부조리 척결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물러나 더 이상 강의할 수 없게 되었다. 멘델레예프가 관여해 국제적인 문제가 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91년 중화학제품에 대한 새로운 수입관세 체계를 만드는 일을 맡았고, 1893년에는 도량형국 국장이 되었다. 이때 멘델레예프는 [[보드카]]의 표준 도수 40도를 정했다. 후세의 보드카 브랜드 중 [[러시안 스탠다드]]에는 이름부터 러시아 표준이며 '멘델레예프가 도수 품질을 정한 보드카'라는 사실을 홍보에 이용하기도 한다. 다만 멘델레예프는 의학이나 생리학자가 아니라 순수 화학자이고, 도량형국 국장의 위치에서 정한 것이므로, 본인의 연구가 아니라 국가에서 제공한 객관적인 통계 자료를 통해 보드카의 도수를 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1898년에는 [[키예프 공과대학교]]의 설립에 크게 관여했고, 그렇게 말년에 냉대를 받다가 폐렴으로 1907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수많은 학생들이 그의 [[원소 주기율표]]를 들고 따랐다. 그의 아들인 바실리 멘델레예프(1886~1922)는 크론슈타트 엔지니어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이후 전설의 [[초중전차#s-5.2|멘델레예프 전차]]를 설계하였다. 멘델레예프 전차는 생긴 건 컨테이너 박스 비슷한 차체에 정면에 120mm 주포를 단 아주 단순한 형식이었지만 당시 고안으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전차였다. 가스압 피스톤 서스펜션을 통해 트랙의 장력 조절과, 높이 조절을 통해 트랙/구동부를 차체 안으로 넣어 보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게만 해도 '''175톤'''이라는 지나치게 무거운 중량과 기술력의 부족으로 인해 [[러시아 제국군]]에게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설령 받아들여졌다고 해도, 차체에 주포가 고정된 전형적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차 디자인인지라 이후 발전하게 되는 전차 기술에 뒤쳐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차르 전차]]보다는 전투의 효율성은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짜르 탱크보단 눈에 띄지도 않고, 전면 150mm / 후면 100mm 수직장갑의 방어력도 그렇고. [[6호 전차 티거|티거]] 중전차가 차체 정면 장갑이 100mm, 포방패 장갑이 110mm인 점에서 상당한 두께인 셈. 다만 러시아의 당시 기술력으로 볼 때 방호력이 제대로 제값을 하긴 어려울 테지만 짜르 탱크에 비하면 상당한 떡장. 화력도 짜르 탱크는 측면에 달린 9파운드 포가 가장 강한 화력인데 비해 멘델레예프 전차는 120mm 해군용 함포를 탑재해서 화력 면에서도 앞섰다. 적어도 이동식 포대로 쓸 수도 있는 활용성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